오전 9시부터 이 글을 쓰기 시작하는 오후 3시까지, 6시간 동안 밥도 먹지 않고 인터넷만 보고 있었다. 목적도 없이, 완결된 만화 몇 편 뒤적이다 질려 유튜브에서 노래를 뒤적이다, 갑자기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모처럼 한가로운 날에 밖에 나가지도 않는건 언제부턴가 비 맞는 거에도 지쳐버린 내 잘못인가?' 글쎄, 불편한 의자 때문에 허리가 아파서 자주 엉덩이를 앞 뒤로 움직여가며 자리를 뜨지 않는 것보다야 낫지 않을까?
디지털카메라 하나를 들고 서울 나들이를 다니며 남의 가게나 집 따위를 찍어대다가 근처 카페에 들어가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숨을 고르는, 그러다 아이패드에 몇 자 끄적이며 마치 '분위기를 향유한다'는 거드름을 피우는 것.
걷고 또 걷고, 어디를 찾아가는 것도 아닌 내키는대로 가는 충동적인 것.
돈과 시간, 체력의 소모가 아쉬우면서도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 괜찮다며 자기최면을 거는 것.
혼자면 혼자인대로, 일행이 있으면 일행이 있는대로 작은 불만을 안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
위와 같은 일련의 행동으로 점철된 나의 휴일은 과연 나의 것일까하는 불안감과 함께 이 책을 시작한다.
책은 4인의 캐릭터가 보내는 일상에 대해 서술한다. 옴니버스식이고 때론 작가가 개입하지만 상관없다. 스토리 자체가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진 않으니까.
알랭, 4인 중 스토리 뼈대를 움켜쥐고 있는 친구는 여성 매력의 중심에 대해 곰곰히 생각함으로써 이 책을 연다. 그는 배꼽을 훤히 내보이는 아가씨들을 보고, 성적 성향의 특성이 허벅지, 엉덩이, 가슴에서 배꼽으로 옮겨가고 있음을 느낀다.
허벅지의 길이는 에로스의 성취로 이어지는 매혹적인 긴 여정의 은유적 이미지다. 엉덩이는 표적을 향한 최단거리의 길, 두 짝인 만큼 더 흥분시키는 표적이고. 가슴은 여자의 산성화, 여성의 고귀한 사명을 표출한다.
반면 배꼽은 무엇일까. 소설이 거의 끝나기 전 작가는 답을 한다.
"한 가지는 분명해. 허벅지나 엉덩이, 가슴하고는 다르게 배꼽은 그 배꼽을 지닌 여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고, 그 여자가 아닌 어떤 것에 대해 말한다는 거야."
"뭐에 대해서?"
"태아."
"태아라, 그렇지." 라몽이 인정했다.
그리고 알랭이 말했다. "예전에 사랑은 개인적인 것, 모방할 수 없는 것의 축제였고, 유일한 것, 그 어떤 반복도 허용하지 않는 것의 영예였어. 그런데 배꼽은 단지 반복을 거부하지 않는 데서 그치지 않고, 반복을 불러. 이제 우리는, 우리의 천년 안에서, 배꼽의 징후 아래 살아갈 거야. 이 징후 아래에서 우리 모두는 하나같이, 사랑하는 여자가 아니라 배 가운데, 단 하나의 의미, 단 하나의 목표, 모든 에로틱한 욕망의 유일한 미래만을 나타내는 배 가운에 조그맣게 난 똑같은 구멍만 뚫어져라 쳐다보는 섹스의 전사들인 거라고."
하나의 문장이 여러 시선으로 겹쳐 보인다.
모성애에 대한 결핍과 갈망.
무감각해지는 말초신경과 그로 인해 두드러지는 번식의 욕구.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얘기도 있으니 이런 해석들을 접어두겠다. 지금, 가장 꽂히는 것은 개별성의 획일화니까.
뭔가 신기하다.
세상은 점점 더 발전해가고 다양성은 늘어가는 것 처럼 보이는데
그 안에서 사람들은 획일적으로 변한다.
선택권은 넓어졌지만 그 선택범위 안에서 동일한 선택을 하는 사람의 수는 늘어간다.
자연스레 우리는 확정된 자유로움 속에서 길들여져 간다.
내 나름대로 일탈이라 여긴, 휴일을 즐기는 방법들도 사실은 어디선가(주로 미디어로부터) 보고, 느끼고, 저래야 겠다고 생각한 행동이다.
그 어디에도 나 자신의 고유성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없다.
( 그래서 찾은 해결책이 인터넷 서핑은 아니지만.)
때로는 방만하게, 하찮고 의미없이, 존재할 뿐인 일들.
익숙한 일탈을, 소소하고 잔잔하게 즐기는 것이다.
책까지 끌어와서 골방 폐인의 비오는 날의 일상을 옹호하는 게 웃기기도 하겠지만!
'무의미라는 이름 그대로 부를 수 있는 용기'가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마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