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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 무라카미 하루키 作, 한양출판

YS-Prajna 2014. 8. 4.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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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 2주 전, 작전사령부 도서관에서 2권의 책을 빌렷다. 한 권은 '잠'이라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소설이고 다른 한 권은 바로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였다. '잠'은 단편이라 빌린 그 자리에서 한 시간 만에 다 읽고 바로 반납처리를 했다. 딱히 독후감을 적고 싶은 책은 아니었다. 어쩌면, 병영문학상 준비로 고민하던 때라, 단순히 글쓰기 귀찮아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상실의 시대' 이후 읽기로 계획했던 책 중 하나다. '나오코'라는, 하루키 소설에선 하나의 '기호'처럼 존재하는 여자의 발자취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의 처녀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가 나오기 때문이다. 뭐 장소는 작품마다 다르지만 그녀는 자살했고, 그 상실의 충격이 하루키 소설의 원동력이 된 것만은 확실하기 때문에 더욱 궁금했었다. 왜 그는 상실이라는 키워드에 집착하는지. 그리고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라는 작품을 통해 그 해답을 찾게 되었다. 비록 번역의 질이 썩 좋은 편은 아니지만, 이 작품 자체가 스토리가 부각되는 작품은 아니고, 하루키의 사상이 담긴 몇몇 문장들의 경우엔 역자가 신경써서 번역한 게 느껴저서 무난하게 읽을 수 있었다.




 "완벽한 문장 따위는 존재하지 않아, 완벽한 절망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야." (중략) 그렇지만 그래도 역시 무엇인가를 쓰려고 하는 단계가 되면 항상 절망적인 기분에 사로잡히게 된다. 내가 쓸 수 있는 영역이 너무나도 제한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p.11


 완벽한 문장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책에 쓰인 글과 지금 내가 쓰고 있는 독후감조차 불완전한 활자에 불과하다. 감정과 생각을 글로 표현하기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글을 쓰고 있는 그 순간의 감상이 과연 사건이 일어났던, 책을 읽었던 그 순간의 감상과 동일하다고 확신할 수 없다. 이 모든 것들은, 타인의 입장에선 기호로써 소비되고 휘발될 것이며, 내게 있어선 퇴색하는 기억의 단편들일 뿐이다.


 문명이란 전달이다,고 그는 말했다. 만일 무엇인가를 표현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하고 같다.   -p.30


 하지만 내가 느낀 것을 표현하고, 존재했다는 사실을 기록하지 않는다면 무엇이 남게 될까? 내 존재는 물론이거니와 내 존재의 상실마저 알아주는 이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장을 쓰는 일은 즐거운 작업이기도 하다. 사는 것의 곤란함에 비한다면,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너무나도 간단하기 때문이다. 십대 때였던가, 나는 그러한 사실을 알아차리고 일주일 정도 말도 못할 정도로 놀랐었다. 조금만 머리를 굴리면 세상은 나의 뜻대로 되고, 모든 가치는 전환되고, 시간은 흐름을 바꾼다...... 그런 느낌조차 들었다.

 그것이 함정이라고 깨달은 것은, 불행하게도 훨씬 뒤의 일이었다.      -p.16


 글을 쓰는 것은 주말에 정오까지 늦잠잤을 때 꾼 꿈과 같다. 평상시 수면 상황에서의 꿈과 얼핏 보면 같다고 생각하겠지만, 둘은 매우 다르다. 늦잠을 자게 되면 몇번쯤 뒤척이며 깬듯 깨지 않은 가수면과 같은 상황에 자주 처한다. 그 과정을 거치면서 내 의식은 활성화되고 어느 순간부턴 꿈을 창조하기 시작한다. 자의식이 투영된 각본을 보고 있는 느낌이다. 문제는 현실로 돌아왔을 때다. 꿈을 꾸는 그 순간에는 달콤함에 취해 행복해한다. 허나 잠에서 깬 순간, 절망과 불안감이 엄습한다. 내 육신이 깃든 현실은 내가 바라는 대로 이뤄지지 않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가끔은 꿈에 중독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지금, 나는 말하려고 생각한다.

 물론 문제는 무엇 하나 해결되어 있지 않고, 말을 마친 시점에서도, 혹은 상황은 꼭 같을지도 모른다. 결국, 문장을 쓴다는 것은 자기 치료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자기 치료를 위한 조촐한 시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직하게 말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내가 정직해지려면 해질수록 정확한 말은 어두움의 저 밑바닥으로 가라앉아 버린다.

 변명할 마음은 없다. 적어도 여기에 말한 것은 현재의 나에 있어서의 베스트다. 덧붙일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도 나는 이렇게도 생각하고 있다. 잘만 되면 훨씬 후에 몇 년인가, 몇십년 후에, 구제된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그때, 코끼리는 평원에 돌아가고 나는 좀더 아름다운 말로 세상을 얘기하기 시작하겠지.   

   -p.12-13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는 이유는 단 하나다. 시간이 지난 뒤에도 그 당시의 감정을 느낌으로써, 그 시공간 속에 내가 존재했었다는 것을 잊지 않고 잊혀지지 않기 위함이다. 자기 치료를 위한 시도. 그것은 상실해버린 내 기억과 감정들을 메꾸려는 안티에이징이다.

 문제는 정확성 또는 진실성이라 부르는 잣대다. 나 하나만을 위한 글이라 할지라도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채 작성하게 된다. 도덕성을 비롯한 보편적 가치관들은, 내가 자각한 것들인지 아님 습득하도록 강요된 것들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그런 사상들을 바탕으로 글을 쓰기 때문에 타인에게 내 감정의 울림을 전달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거짓말과 같은 메커니즘이다.


 나는 가끔 거짓말을 한다.

 마지막으로 거짓말을 한 것은 작년의 일이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굉장히 기분 나쁜 일이다. 거짓말과 침묵이 현대의 인간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두 개의 거대한 죄악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이지 우리들은 자주 거짓말을 하고, 그리고 맨날 침묵해 버린다.

 그러나 만일 우리들이 끊임없이 얘기를 하고, 그것도 진실밖에 얘기하지 않는다면 진실의 가치 따위는 없어져 버릴지도 모른다.  -p.108


 거짓을 고하는 것은 어느 순간부터 습관을 넘어 내 삶이 되었다. 가지지 못한 자가, 공작새 마냥 무엇인가 뽐내고 싶어한다. 사랑하는 여자를 떠올릴 때 마다 신경림의 '가난한 사랑 노래'의 한 구절이 떠오르는 것 처럼, 다시 나는 거짓으로 치장한 채 평가 받길 원하고 그 결과로 현실보다는 더 이상(꿈)에 가까운 왜곡 속에서 살기 바라고 있다.


 행복해?라고 누가 묻는다면은 그렇겠지,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꿈이란 결국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p.125


 오늘 하루도 무사히 마쳤다는 것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는 주제에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어린 시절 꿈은 퇴색되어 버린지 오래다. 이젠 내일도 내가 삶을 영위하는데 있어 방해될 것이 없기만을 소망하고 살고 있다. 살아있기에 살아가는 것이다. 일과를 마치고 행복한 마음으로 쉴 수 있는 것은 이제 곧 '꿈'을 꾸는, 내가 주인공인 세상에서 '또 다른 삶'을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자에게 오늘과 내일, 그 이상은 없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 아무도 그걸 붙잡을 수는 없다.

 우리들은 그렇게 살아간다.   -p.124


 필멸자의 운명 속에서 현실에 속박될 필요는 없다. 이제, 다시 꿈을 꾸러 가자.




 독후감에서 발췌한 부분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 나온다. 1973년의 핀볼 같은 경우에는 스토리를 제외하곤 크게 감명 받은 부분은 없었다. 핀볼 기계를 찾아 떠나는 여정 속에서 감동을 느끼긴 했으나, 그건 내가 사물에 대한 욕심과 집착이 강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초등학생 때, 소중히 여기던 실베스타 인형을 지하철 2호선에서 두고 내린 것 때문에 한동안 눈물로 날을 지샜으며 지금 까지도 가슴 아파 하는 걸 보면 내겐 애정결핍증이 있는 것도 같다.

 하루키와의 인터뷰를 보면 '결국 산다는 것 자체로 자기 표현이 가능하다면 소설 따위는 쓸 필요가 없지요. 자기 안에 뭔가 결락된 부분이 있기 때문에 쓰는 거지요.' 라는 내용이 나온다. 또 역자의 하루키 문학에 대한 해설 중에서는 '언어는 상대에게 부담을 주는 주술력을 상실하고 단지 소비되는 기호가 된다. 남을 결코 가슴 아프게 하지 않겠다는 '나'의 윤리는 남도 내게 부담이 되지 않는 무의미한 기호이기를 요구한다. (중략) 어쩌면 적당한 무관심만이 따뜻함이 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커뮤니케이션을 체념한 '내가' 지키는 '거리'만큼 그의 따뜻함도 돋보인다. // 무라카미 문학의 특질은 사회에 대해 혹은 개인 생활을 둘러싼 가장 가까운 모든 것에 대해 일체 능동적 자세를 취하지 않겠다는 각오 위에 성립되어 있다. 그 각오 위에 서서 풍속적인 환경의 영향을 거부하지 않고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며 자기 내부의 꿈의 세계를 파탄없이 짜내는 것, 이것이 그의 방법론이다. 어떠한 능동적 자세도 안 지니는 인간이 풍요한 소비만이 있는 도시에서 어떻게 유쾌하고 멋있게 살아갈 것인가? 그 모델을 얼마간의 투명한 비애감과 곁들여 -이 비애감도 동시대 사회와 세계가 지니는 흐릿한 그림자를 선명히 반영하는 것이지만- 제시하는 것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학이다.' 내용이 있다. 나름 작가나 문학 전공자와 비슷한 감상을 느꼈지만, 어휘의 질은 물론 그 내용조차 실한 부분이 없어서 더욱 아쉽다. 타인과 '꼭' 같은, 동일한 감상을 원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글을 자주 쓰고, 많은 작품들을 접해보면 해결될 것이라 믿는다. 언어에 대해서도 많이 공부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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