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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Norwegian Wood/ 상실의 시대 - 무라카미 하루키 作, 문학사상

YS-Prajna 2014. 7. 4.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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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와서 처음 읽은 문학책.

무라카미 하루키가 유명한 건 알았으나, 과거 주위 사람들 중 불호하는 사람이 좀 많아서 그의 책을 생각보다 늦게 접하게 되었다.

허나 우려와는 달리,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94년생으로, 어딜가든 애 취급 받으면서 살았던 내가 벌써 이런 책에서 공감가는 부분들을 발견할 만큼 다양한 경험을 한 것인가.

80년대 작품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시대를 초월하여 공감할 수 있을 만큼, 이 책은 단순한 키워드를 주제로 삼는다.

바로 사랑이다.

 "나는 스무 살 때 20년 후엔 나 역시 마흔 살이 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제 사십대가 된 나는 그 젊은 날을 회상하며 '상실의 시대'에 담긴,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사실에 대한 참된 의미를 한국의 독자 여러분과 함께 생각하고 싶습니다."---한국어판에 보내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메시지.

자세한 감상은 뒤에 적기로 하고, 책을 보면서 와닿는 부분, 색다른 표현을 간추려 놓은 것을 먼저 적겠다.

'문학사상'에서 나온 책을 바탕으로 하였다.


p.5
And when I awoke I was alone.

비틀즈의 노래 제목이면서 이 책의 원제인 'Norwegian Wood'의 가사중 한 부분으로, 이 책의 전반적인 내용을 관통하고 있다.


p.23-24
 아주 오래전 내가 아직 젊고 그 기억이 훨씬 선명했을 때, 나는 나오코에 관한 글을 써보려고 시도한 적이 몇 번이가 있었다. 하지만 그땐 단 한 줄도 쓸 수가 없었다. 맨 처음 한 줄만 나와준다면 그 다음은 무엇이든 술술 써지리라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그 한 줄이 아무리 애써도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모든 것이 너무나 지나치게 선명해서 어디서부터 손을 대면 좋을 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너무나 극명한 지도가, 그 극명함이 지나쳐 때로는 도움이 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젠 알게 됐다. 결국 따지고 보면 글이라는 불완전한 그릇에 담을 수 있는 것은 불완전한 기억이나 불완전한 상념밖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오코에 관한 기억이 내 안에서 희미해져가면 갈수록 나는 더욱 깊이 그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왜 그녀가 나를 향해 "나를 잊지 말아줘."라고 부탁했는지, 그 이유도 지금의 나로선 알 수 있다. 물론 나오코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내 안에서 그녀에 관한 기억이 언젠가는 희미해져가리라는 것을. 그래서 그녀는 바로 나에게 간절히 호소했던 것이다. "나를 언제까지나 잊지 말아줘. 내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걸 기억해줘." 하고.
 그런 생각을 하면 나는 참을 수 없이 슬퍼진다. 왜냐하면 나오코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거에 자전적인 단편 소설을 쓰려고 준비했었던 적이 있었다. 나름 주제와 방향은 잘 잡았다고 생각하고 플롯도 괜찮게 구성했었지만, 문장으로 풀어낼 수가 없었다. // 잊지 말아달라는 말이 얼마나 잔인한 지. 색은 바래갈 지언정 윤곽을 또렷히 남는 기억들이 몇 개 있는데 그 중 대부분은 날 비참하게 만드는 것들이다. 때론 망각에 대한 선택권이 없다는 것이 슬프다.


p.46
 죽음은 삶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 말로 해버리면 평범하지만, 그때의 나는 그것을 말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공기덩어리로서 몸 안쪽에서 느꼈던 것이다. 문진 속에도, 당구대 위에 나란히 놓여 있는 네 개의 빨갛고 하얀 공 안에도 죽음은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마치 미세한 티끌처럼 폐 속으로 들이마시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역시 '기억'과 관련된 문장이다. 사람의 죽음이 여전히 내 삶의 일부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들을 기억한다는 것만이 아니다. 반면교사가 되든 타산지석이 되든, 그들은 내 삶에서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몇 안되는 것들에 반영되어 내 미래를 바꿀 것이다.


p.75
 나는 몇백 번이고 이 편지를 되풀이해서 읽었다. 그리고 다시 읽을 때마다 견딜 수 없이 서글퍼졌다. 그것은 바로 나오코가 물끄러미 나의 눈을 들여다 보았을 때 느낀 것과 똑같은 종류의 슬픔이었다. 나는 그 같은 안타까운 심정을 어딘가로 가져갈 수도, 어딘가에 간직할 수도 없었다. 그것은 몸 주변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처럼 윤곽도 없고, 무게도 없었다. 나는 그런 심정을 마음에 담아두는 일조차 할 수 없었다. 풍경이 내 앞을 천천히 스쳐 지나갔다. 그것들이 하는 말이 전혀 내 귀에는 와 닿지 않았다.


표현이 좋아서 메모해 두었다. 초등학생 때 좋아하던 여자애한테 이민가게 된다는 편지를 받고, 그것을 수없이 읽었을 때 정말 슬펐다. 만약 조금 더 성숙한 뒤에 같은 경험을 했다면, 위의 표현과 같이 가슴 아려하고 공허해 했을 것이다.


p.100-101
 "부자의 최대 이점이 뭐라고 생각해?"
 "몰라."
 "돈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는 거야. 가령 내가 반 친구한테 뭘 좀 하자고 하면 상대는 이렇게 말한단 말이야. '나 지금 돈이 없어서 안 돼.'라고. 그런데 내가 그런 입장이 된다면, 절대 그런 소리를 못하는 거야. 내가 만일 '지금 돈이 없어.' 라고 말한다면, 그건 정말 돈이 없다는 소리니까. 비참해질 뿐이지. 예쁜 여자가 '나 오늘은 얼굴이 엉망이니까 외출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과 마찬가지지. 못생긴 여자가 그런 소릴 해봐, 웃음거리만 될 뿐이야. 그런 게 내 세계였던 거야. 작년까지 육 년간이나."


'미도리'는 고작 6년의 시간 동안 그렇게 살았지만, 난 초등학교 3학년때 가정형편을 알게 되었을 때부터 그렇게 살아왔었다. 돈 많은 애들을 부러워하지 않으려고 그들 앞에서 더욱 당당하려 노력했었다. 하지만, 그들이 나를 선망하고 자기들과 친하길 원했어도 난 함께 지낼 수 없었다. 비참해질 뿐이기 때문이었다.


p.124
 여느 때나 다름 없는 대학의 점심시간 풍경이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새삼스럽게 그런 풍경을 바라보는 동안, 나는 문득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들이 저마다 나름대로 행복해 보인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정말 행복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단순히 그렇게 보일 뿐인 것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어쨌든, 그 구월 하순의 기분 좋은 한나절에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 보였고, 그 덕분에 나는 여느 때보다 쓸쓸한 기분을 느꼈다. 나 혼자만이 그 풍경에 익숙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대학교 1,2학년 때 비일비재하게 겪었던 장면이다. 난 항상 금전적으로 힘들어서 친구들과 간단하게 식사하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그렇게 학교 생활을 하다 보니 어느새 같은 수업을 듣는 사람들 이외엔 나와 연락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외로워질 때마다 대학동기들한테 연락해봐도, 이미 그들에게 나는 친해지기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어있었기 때문에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풍경에 익숙하지 못한 것을 넘어, 고립되어 갔다.


p.258-259
 "저, 난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제일 먼저 포크송 동아리에 들어갔어. 노래를 부르고 싶었거든. 그런데 그게 순 엉터리 같은 놈들의 소굴이었어. 지금 생각해봐도 소름이 오싹 끼쳐. 거기에 들어갔더니 우선 마르크스를 읽으라는 거야. 몇 페이지부터 몇 페이지까지 읽어오라고. 포크송이란 사회와 기본적으로 서로 연관되어야 한다는 그런 연설을 하고 나서 말이지. 그래서 나는 할 수 없이 열심히 마르크스를 읽었어, 집에 돌아가서. 하지만 무슨 소린지 통 알 수가 없더라고. 가정법 이상으로 말이야. 겨우 세페이진가 읽다가 내던져버렸어. 그리고 다음 주 모임에 가서, 읽어봤지만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더라고 말했어. 그랬더니 그 이후로는 사람을 완전히 바보 취급하는 거야. 문제의식이 없다느니, 사회성이 결여되어 있다느니 하면서. 웃기지 말라 그래. 나느 단지 문장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 말했을 뿐인데. 이건 너무 심하다고 생각되지 않아?"
 "흠." 하고 나는 말했다.
 "토의라는 건 또 왜 그렇게 지겨운지. 모두들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얼굴을 한 채 어려운 말만 쓰는 거야. 나는 이해가 잘 되지 않아서 그때마다 질문을 했어. '그 제국주의적 착취란 무슨 뜻입니까? 동인도회사와는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또는 '산학 협동체 분쇄란, 대학을 나온 다음에도 회사에 취직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까?' 하고 말이야. 하지만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았어. 오히려 정색을 하면서 화를 내는 거야. 이런 얘기 믿을 수 있어?"
 "믿을 수 있어."
 "'그런 걸 모르면 어떻게 하냐?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는거야, 너는?' 그걸로 끝이야.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물론 난 그다지 머리가 좋지 않아. 서민이고. 하지만 세상을 지탱하고 있는 게 서민이고, 착취당하고 있는 것도 서민이잖아. 서민이 알지 못하는 말이나 지껄이면서 뭐가 혁명이고, 무슨 놈의 사회 변혁을 하겠다는 거야. 나 역시 세상이 더 좋아지게 만들고 싶어. 만일 누군가가 정말 착취당하고 있다면, 착취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 그렇기 때문에 질문하는 거 아니겠어, 그렇잖아?"


정치 사상과 상관 없이 저런 애들이 2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존재한다는 것에 실소했기 때문에 적었다. 진보와 보수를 떠나, 저런 친구들 중에 정치 문제 등에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사회 경험이 적은 탓일까, 아니면....


p.269-270
 "병원이라서 그럴 거야." 하고 미도리는 주위를 둘러보면서 말했다.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다 그래. 냄새나 소리, 가라앉은 공기, 환자의 얼굴, 긴장감, 초조, 실망, 고통, 피로 --- 그런 것들 때문이야. 이런 것들이 위를 억눌러서 식욕이 나지 않게 만드는 거야. 하지만 익숙해지면 그런 것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겨져. 그리고 밥을 든든히 먹어두지 않으면 환자를 간호할 수도 없고. 정말이야, 난 할아버지와 할머니, 어머니, 아버지까지 네 분의 병간호를 해봤기 때문에 아주 잘 알고 있어. 무슨 일이 갑자기 생겨서 제때 밥을 먹을 수 없는 경우도 있어. 그러니까 먹을 수 있을 때 든든히 먹어두지 않으면 안 돼."
 "네 말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하고 나는 말했다.
 "친척들이 문병을 오면 여기서 함께 식사를 해. 그러면 모두 너처럼 절반쯤 남겨. 그래서 내가 밥을 모두 먹어치우면 '미도리는 건강해서 좋겠다. 난 가슴이 답답해서 더 먹을 수가 없는데 말이야.' 하고 말해. 하지만 병간호를 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나야. 다 웃기는 소리지. 다른 사람은 가끔 찾아와 동정만 하다 갈 뿐이지. 대소변을 받아내고, 가래를 받아내고, 몸을 닦아주는 건 나란 말이야. 동정만으로 대소변을 받아내는 일이 해결된다면, 난 남들보다 오십 배는 더 동정할 거야. 그런데 내가 밥을 다 먹으면 모두 나를 비난하는 듯한 눈초리로 쳐다보면서 '미도리는 건강해서 좋겠다.'는 거야. 모두들 내가, 무슨 짐수레라도 끌고 다니는 당나귀 정도로 여겨지나봐. 나이도 들 만큼 든 사람들이 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를까? 입으로는 무슨 말이든 할 수 있지. 중요한 건 대소변을 받아내느냐의 여부라고. 나라고 마음의 상처를 받지 말란 법 있어? 나도 기진맥진할 때도 있고, 마냥 울고 싶을 때도 있어. 쾌유될 가망도 없는데 의사들이 달려들어 머리에 메스를 대고 이리저리 만지는 그런 짓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고, 또 되풀이할 때마다 악화되어 머리가 점점 이상해져가는 모습을 줄곧 지켜보고 있어봐, 견딜 수가 없단 말이야. 게다가 저축해둔 돈은 점점 줄어들지, 앞으로 삼 년 반이나 남은 대학을 더 다닐 수 있을지도 알 수 없고, 언니도 이런 상태로는 결혼식도 올리지 못할 거고."


미도리처럼 환자 곁에 붙어 병간호를 해본 적은 없다. 다만, 외할머니께서 편찮으셔서 요양병원에 입원하셨을 적에 저런 경험을 많이 했었다. 병원에 다녀온 뒤 밥도 못먹고 멀미한 적도, 친척 중에 외할머니를 찾아뵙지도 않으면서 힘들고 가슴 아프다는 말을 하는 사람을 보고 분노한 적도, 미도리처럼 '기진맥진할 때도 있고, 마냥 울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내 앞에선 절대로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신 어머니를 보며 괴로워했던 적도 있었다.


p.285-286
 때때로 지독하게 외로운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나는 그런대로 건강하게 지내고 있다. 나오코가 매일 아침 새장을 청소하고 밭일을 하는 것처럼, 나도 매일 아침 나 자신의 태엽을 감고 있다. 침대에서 나와 이를 닦고, 수염을 깎고, 아침식사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기숙사 현관을 나가서 학교에 도착할 때까지 나는 대략 서른여섯 바퀴쯤 드르륵드르륵 태엽을 감는다. 자, 오늘도 열심히 살아보자, 하고 생각한다. 나 자신도 모르고 있었는데 나는 요즘 들어 곧잘 혼잣말을 하는 듯하다. 아마도 태엽을 감으면서 뭐라고 중얼거리는 것이겠지.
 너를 만날 수 없다는 게 괴롭긴 하지만, 만약 네가 없었다면 나의 도쿄 생활은 더 끔찍한 것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침 침대 속에서 너를 생각함으로써, 자, 태엽을 감고 오늘 하루도 열심히 살아보자 하고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네가 그곳에서 열심히 살고 있듯이 나도 이곳에서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일요일이어서 태엽을 감지 않아도 되는 아침이다. 빨래를 끝내고 지금 방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다. 이 편지를 다 쓰고는 우표를 붙여 우체통에 넣어버리면, 저녁때까지 아무런 할 일이 없다. 일요일엔 공부도 하지 않는다. 나는 평일에 강의를 들으며 짬짬이 도서실에서 착실하게 공부하고 있으니까 일요일엔 달리 공부할 것도 없다. 일요일 오후는 조용하고 평화로우며, 고독하다. 나는 혼자서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한다. 나오코가 도쿄에 있었을 무렵 일요일에 둘이서 거닐었던 길들을 하나하나 떠올려볼 때도 있다. 나는 나오코가 입고 있던 옷가지들까지 아주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다. 일요일 오후가 되면 정말 여러 가지 기억들이 되살아나곤 한다.


나오코를 어머니로, 주인공의 배경을 군대로만 바꾼다면 어머니께 보내는 편지로 쓸 수 있을 정도로 내 현재 상황과 들어맞는 부분이다.


p.331-332
 "네가 너무 좋아, 미도리."
 "얼마만큼 좋아?"
 "봄날의 곰만큼."
 "봄날의 곰?" 하고 미도리가 또 얼굴을 들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봄날의 곰이라니?"
 "봄날의 들판을 네가 혼자 거닐고 있으면 말이지, 저쪽에서 벨벳처럼 털이 부드럽고 눈이 또랑또랑한 귀여운 아기 곰이 다가오는 거야. 그리고 네게 이러는 거야. '안녕하세요, 아가씨. 나와 함께 뒹굴기 놀이 안 할래요?' 하고. 그래서 너와 아기 곰은 서로 부둥켜안고 클로버가 무성한 언덕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온종일 노는 거야. 어때, 멋지지?"


나도 봄날의 곰처럼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다.


p.337
 시간마저도 나의 걸음걸이에 맞추어 느리게 뒤뚱거리며 흐르고 있었다. 주위 사람들은 이미 저만큼 앞서 가고 있었지만, 나와 나의 시간만은 진창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내 주변 세계는 크게 바뀌어가고 있었다. 존 콜트레인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사람들은 변혁을 부르짖었고, 그 변혁은 바로 가까운 저 길모퉁이까지 다가와 잇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런 모든 일들은 아무 실체가 없는, 무의미한 배경 그림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거의 고개를 숙인 채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뿐이었다. 내 눈에 비치는 것은 무한히 계속되는 진창뿐이었다. 오른발을 앞으로 내딛고, 그리고 또 왼발을 들어 올렸다. 나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확실하지 않았다. 올바를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확신도 없었다. 그저 어디론가 가야 하니까 한 걸음 한 걸음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오발탄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방향을 잡지 못한채 하루를 사는 것은 이제 그만하도록 하자.


p.343
 "자, 행복하게 지내라. 많은 일이 생기겠지만 너도 상당히 고집스런 데가 있으니까 어떻게든 잘해내가리라 믿는다. 그런데 한 가지 충고해도 될까, 내가?"
 "좋아요."
 "자기 자신을 동정하지 마라." 하고 그가 말했다. "자신을 동정하는 건 비열한 인간이나 하는 짓이야."


그래, 내 자신을 동정하지 말자. 내 과거와 현재가 마음에 들지 않다고 해서 더 이상 나를 불쌍하게 여기지 말고, 내 자신을 포기하지 말자. 



 이 책의 첫 장(Chapter)을 읽고 난 직후엔 어느 방향으로 스토리가 전개될 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러나 책을 끝까지 읽고 다시 한 번 읽자, '나'가 갖고 있는 상실의 상처가 얼마나 깊은 것인지, 어째서 '나오코' 자체에 관한 기억은 잊혀져 가면서도 함께했던 추억들은 선명히 남아있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상실의 시대'의 화제는 '사랑'이다. 저자가 서문에서 언급했듯이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사실에 대한 참된 의미'가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묻고 있다. 수 많은 결합과 상실 속에서 성숙해진 척 하면서도, 진창 속에서 제자리걸음 하듯 방황하고 있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주인공들에게 투영시켜서 그런지 쉽게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 출간되고 20여 년이나 지난 지금에도 '사랑'이란 감정은 불변한 채로 존재했기 때문일까?
 개인적으로 공감가고, 호감가는 캐릭터는 '미도리'다. 그녀의 성격이나 행동에 대한 묘사를 봤을 때, 매력적일 지도 모르겠으나 내 취향은 전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와 관련된 장면들을 그녀를 불쌍하게 생각하면서도 동정할 수 없는 것은, 그녀가 무서울 정도로 나와 닮았기 때문이다. '나'와 '미도리'가 나눈 대화 중 부자 얘기가 나온 대목이라던가(p.100 - 101), 동아리 얘기를 하다가 나온 혁명과 선동가들에 관한 입장(p.259), 병간호를 하면 겪었던 경험(p.269-270)이라던가. 모두 내가 거의 흡사한 경험을 했었거나 평소에 생각해왔던 것들이다. 비록 내가 그녀처럼 저돌적이고 엉망진창은 아닐 지라도, 그 외의 것은 꼭 그녀의 분신이라도 된 것 처럼 공감가고 이해할 수 있었다. 상실의 시대를 읽으면서 '남을 이해한다'라던가 사람간의 관계가 '노력'으로 회복될 수 있다는 말이 얼마나 오만한 것인가 깨닫게 되어 인간 관계에 관해선 '이해'라는 단어를 안 쓰기로 마음먹었다. 허나, '미도리'는 나와 동류이기 때문에, 그녀를 이해한다는 표현을 쓸 수밖에 없다.
 작품의 말미 까지도 작가는 인생이란, 특히 사랑이란 '결합-상실-재생'이 반복되는 것임을 보여준다. 아직 결합의 환희조차 느끼지 못한 나라서 앞으로 닥쳐올 상실이 두렵게만 느껴진다. 순환이 반복되며 세월이 자난 후 나 자신을 성찰했을 때, 과연 난 과거의 흉터들을 보며 내 자신이 이토록 성숙했음을 찬탄하게 될까, 아님 과오라 생각하고 괴로워하며 회한하게 될까. 너무 이른 걱정일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처럼 좋은 친구를 잃을까 두렵다는 이유로, 가난하다는 이유로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하지 않는 것은 비겁한 짓이며, 내 껍질에 갇혀있는 편협한 일이다. 더 이상 자기 자신을 동정하고 살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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